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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언론 통제의 실상 '사라진 목숨과 잊혀진 참사'

 4월 11일 새벽, 중국 충칭의 창장대교 하단에서 젊은 남성이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4월 23일, 경찰은 강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 남성은 후난성 출신 21세 청년 류제였다. 류제는 게이머 '팡마오'로 중국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자살은 여자친구와의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팡마오도 자신의 죽음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상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2021년 11월, 팡마오는 인터넷을 통해 충칭에 사는 여성을 알게 되었다. 여성은 그보다 나이가 6세 많았다. 둘은 매일 온라인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고, 결국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점으로 연인이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후난과 충칭을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했고,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 항상 다시 만났다. 그러나 2023년 10월, 팡마오가 충칭으로 이주한 후 갈등이 더 심해졌고, 4월 10일에는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이날 팡마오는 여자친구에게 큰 금액을 보내고 친구 목록에서 삭제한 뒤 관계를 끊었다. 여자친구는 돈을 반환하려 했지만, 이메일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4월 11일 새벽, 팡마오는 창장대교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후 5월 1일 새벽, 메이다고속도로 붕괴 사건이 발생하여 어린이부터 노동자까지 다양한 사람들 51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때, 팡마오가 '부활'했다. 중국의 모든 매체와 소셜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갑자기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누나가 생전에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공개하자, 그와 관련된 여러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팡마오는 급기야 '스타'가 되었고, 그의 여자친구는 '꽃뱀'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누나는 동생의 사생활을 공개한 것에 대해 법적 조치를 받았고, 팡마오의 여자친구 역시 공격당했다. 인터넷상에서는 팡마오의 사건이 큰 관심을 끌며 전국적인 논쟁으로 번져나갔다. 모두가 메이다고속도로 붕괴 사고의 참상을 까마득히 잊은 채 ‘팡마오 사건’에 주목했으며, 노동절 연휴 동안 중국의 모든 이슈가 '팡마오'로 잠식됐다. 중국 언론과 소셜미디어는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은 청년 팡마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5월 6일, '싼롄생활주간'은 메이다고속도로 붕괴 사건에 대한 첫 종합 리포트를 게재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게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다. 이 사고로 사라진 51명의 삶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5월 19일, 충칭 공안국은 팡마오 사건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팡마오와 여자친구 사이의 금전 거래는 정상적인 연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어떠한 사기나 갈취도 없었다. 경찰은 팡마오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생활 공개로 인해 팡마오 누나를 법적으로 처벌할 것이라 밝혔고, 이에 따라 팡마오 누나의 모든 소셜미디어 계정이 폐쇄되었다.

 

메이다고속도로 붕괴 사건이 사라지면서 팡마오도 다시 '사망'했다. 한 네티즌은 이에 대해 푸념했다. “어떤 죽음은 잊히고, 어떤 죽음은 이용되고, 어떤 죽음은 아예 기억되지 않는다.”

 

'신이 내린 목소리' 40년, 조수미를 만든 결정적 계기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자신의 음악 인생을 관통해 온 열정과 신념을 되돌아봤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흘러간 40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만연했던 클래식계의 장벽을 허문 선구자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우뚝 섰다.그의 여정은 시작부터 도전의 연속이었다. 1970년대 말, 아직 학생이던 딸의 재능을 확신한 아버지가 무작정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찾아가 데뷔 방법을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만 해도 서양 고유의 문화인 오페라 무대에서 동양인 성악가는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는 결국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을 모두 섭렵한 최초의 동양인 프리마돈나가 되었다.조수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한국인 최초 그래미상 수상, 동양인 최초 이탈리아 황금 기러기상 수상, 비(非)이탈리아인 최초 국제 푸치니상 수상 등 그의 발자취는 곧 K-클래식의 새로운 역사였다. 이러한 성과는 타고난 재능과 지독한 노력, 그리고 승부욕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다.물론 그의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을 들려주며 운명을 정해준 어머니와, 20대 신예였던 그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신이 내린 목소리'라 극찬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시킨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바로 그들이다.자신이 받았던 사랑과 기회를 이제는 후배들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2024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국제 성악 콩쿠르를 창설하며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단순히 상금을 주는 것을 넘어, 세계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다.데뷔 40년이 흘렀지만, 60대의 거장은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경험에 안주하는 것을 가장 위험한 일로 여기며, 예술에 관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날카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시간은 여전히 세계 무대를 향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