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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혁, 금빛 점프로 아시아 씹어먹다! '정상은 내 것!'

 우상혁(용인시청)이 또다시 아시아 육상 무대에서 빛났다. 그는 29일 경북 구미시민운동장에서 개최된 2025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29를 뛰어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우상혁은 2023년 방콕 대회(2m28) 우승에 이어 연속으로 아시아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고, 2017년 부바네스와르 대회(2m30) 우승까지 포함해 개인 통산 세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번 결선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 진행됐다. 당초 오후 5시40분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경기는 28일부터 쏟아진 폭우로 인해 오후 8시10분으로 연기됐다. 그러나 29일에도 비가 계속되며 결국 오후 9시40분에야 경기가 시작됐다. 축축하게 젖은 트랙과 필드, 그리고 조명 아래서 진행된 한밤중의 경기였지만, 우상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상혁은 2m15를 시작으로 2m19, 2m23, 2m26까지 모든 높이를 1차 시기에 가볍게 넘으며 안정적인 경기를 펼쳤다. 결선에 출전한 13명 중 11명이 탈락하고, 우상혁과 신노 도모히로(일본)만 남았다. 도모히로 역시 2m26까지 실수 없이 성공하며 팽팽한 경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상혁은 2m29마저 1차 시기에 넘으며 도모히로를 압도했고, 도모히로는 2m29에서 세 번 모두 실패하며 우상혁의 뒤를 이어 은메달에 머물렀다.

 


우상혁은 이후 2m33에 도전했지만, 세 차례 모두 실패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번 우승으로 그는 아시아선수권 남자 높이뛰기에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기록하며 이진택(1991년, 1993년, 1995년)과 함께 대회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 후 우상혁은 "모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어 정말 영광스럽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김도균 코치님과 멀리서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용인시청, 대한육상연맹,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켜준 모든 분께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우상혁의 가장 큰 라이벌로 꼽히던 무타즈 에사 바르심(카타르)이 불참했지만, 우상혁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독보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우상혁은 이제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오는 6월3일 이탈리아 로마로 출국해 6월6일 열리는 다이아몬드리그에 출전한다.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모이는 다이아몬드리그에서 우상혁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팬들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그들은 누구인가? 고문과 배신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비극

 지난달, 95세의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씨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돌아가려다 제지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잊혔던 존재, '비전향 장기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누군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내주자"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이용될 뿐"이라며 격렬히 비난한다. 2000년 마지막 송환 이후 25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늙은 공산주의자들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비전향 장기수'는 말 그대로 사상 전향을 거부한 채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이들이다. 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사상 전향 정책'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잔혹성이 극에 달한 것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1973년, 법무부는 '좌익수형수 전향공작전담반'을 공식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 군 정보부대, 경찰 출신 요원들이 투입됐고, 심지어 교도소 내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자들이 '하수인'으로 동원됐다.진실화해위 보고서 등에 기록된 강제 전향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몽둥이 구타는 기본이었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붓는 물고문,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고문이 공공연히 자행됐다. 정부는 전향자 1명당 10만 원의 성과금을 내걸며 '인간 사냥'을 독려했다. 이 끔찍한 '공작'의 결과, 1973년 400여 명에 달하던 비전향 장기수는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다. 전향을 거부한 이들은 독방에 갇혀 온종일 벽만 봐야 했고, 배식, 운동, 치료 등 모든 면에서 차별받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1975년에는 출소자를 다시 가둘 수 있는 '사회안전법'까지 만들어졌다. 2년마다 갱신 가능한 '보안감호' 처분은 법원의 견제도 받지 않는 사실상의 무기한 재수감이었다. 이 악법은 1989년에야 폐지되었고, 이후 120여 명의 장기수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들 94명의 복역 기간을 합산하니 무려 2,854년, 1인당 평균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고(故) 김선명 씨는 43년 10개월을 복역해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되기도 했다.이들의 북송은 몇 차례 이뤄졌다. 1993년 인민군 종군기자였던 리인모 씨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북으로 돌아갔고,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63명이 대대적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시 송환을 원치 않았거나, 강제로 전향했던 이들이 뒤늦게 송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2005년, 참여정부 시절 2차 송환이 급물살을 타는 듯했지만,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와 얽히고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문재인 정부 때 다시 운동이 재개되기도 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동력은 사라졌다.그리고 2024년, 95세 안학섭 씨의 '판문점 돌진'이 다시 불씨를 지폈다. 현재 정부에 공식적으로 북송을 요청한 장기수는 안 씨를 포함해 6명. 모두 80~90대의 고령이다. 최후의 여성 빨치산 박수분(94) 씨, 남파공작원이었던 양원진(96) 씨 등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 그 자체다. 이들 중 고향이 북한인 사람은 단 2명. 나머지는 남쪽에서 태어나 좌익 활동을 하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들이다.한때 30명이 넘었던 2차 송환 희망자는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나 10여 명 남짓 남았다.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이념 대립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늙고 병든 이들의 마지막 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