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성폭행범 혀 절단' 징역형 사건 재심 결정


61년 전 성폭행 시도에 맞서 싸우다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버린 한 여성의 오랜 투쟁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부산고등법원은 최말자(78) 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며, 1964년 당시 19세 여성에게 가해진 부당한 법적 판단을 다시 살펴보게 됐다. 당시 최 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영장 없는 체포와 감금, 기본적 인권 보장 절차 무시 등 심각한 불법이 자행됐다. 최 씨는 부산지검에서 독방에 감금된 채 수갑을 찬 상태로 검사 심문을 받았으며, 구속 사유나 변호인 선임권 등 기본적인 법적 권리도 고지받지 못했다.

 

결국 최 씨는 중상해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로서는 성폭행 피해자가 자기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마저 범죄로 처벌받는 악순환이 반복됐던 것이다.

 

이번 재심 인용까지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2020년 5월 재심을 청구했으나, 부산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검사의 위법 행위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잇따라 기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최 씨 진술의 신빙성과 검사의 위법 행위 가능성을 인정하며 사건을 파기환송했고, 이번 부산고법의 재심 인용으로 이어졌다.

 


재판부는 최 씨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된다고 평가했다. 특히 60세가 넘어 검정고시를 치르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재심을 청구하게 된 그의 여정에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수십 년 전에 발생한 수사기관의 범죄 혐의로 피해를 입었다고 진술하는 최 씨에게 수사기관이 공소를 제기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불법 수사와 인권침해에 대한 현대적 시각의 재평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최 씨는 1심부터 새로운 재판을 받게 된다. 61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진실을 밝힐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번 사건은 과거 여성들이 겪었던 부당한 처우와 법적 차별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전 설화의 발칙한 반란, 가부장제 부순 두 여성의 처절한 연대기

 가부장적 질서 아래 희생된 두 여성의 영혼이 저승 법정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마주한다. 뮤지컬 ‘홍련’은 고전 설화 ‘장화홍련전’과 ‘바리공주’를 현대적 시각으로 해체하여 재조립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동생을 해친 혐의로 기소된 홍련과 그를 심판해야 하는 바리의 대립을 통해, 극은 단순히 죄의 유무를 따지는 것을 넘어 억압받아온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데 집중한다.천도정의 재판장 바리는 법과 원칙을 앞세워 홍련의 죄를 추궁하지만, 홍련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했던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팽팽하게 맞선다. 이 과정에서 두 인물이 공유하는 가정 내 학대와 유교적 억압의 상처가 서서히 드러난다.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홍련과 버림받은 신 바리는 서로의 아픔을 투영하며 심판자와 피고인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강혜인은 방어적인 태도 뒤에 숨겨진 홍련의 처절한 공포와 분노를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학대의 굴레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날을 세우면서도, 그 이면에 자리한 슬픔을 섬세한 음색 변화로 포착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김경민은 냉철한 신의 모습으로 극의 중심을 잡는 동시에, 홍련의 과거를 마주하며 흔들리는 내면의 동요를 밀도 있게 그려내며 극적 긴장감을 더한다.음악적 구성은 서양의 강렬한 록 사운드와 동양의 전통 씻김굿 선율을 절묘하게 혼합했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드럼 비트는 인물들이 세상에 던지는 저항의 메시지를 청각적으로 극대화한다. 반면 극의 기저를 흐르는 씻김굿의 가락은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제의적 역할을 수행한다. 배우들의 폭발적인 보컬은 록 음악의 타격감과 어우러져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한다.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의 원형 무대는 저승 법정이라는 폐쇄적 공간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거대한 장치 대신 조명의 극명한 대비를 활용해 이승과 저승, 현재와 과거를 유연하게 교차시킨다. 특히 저승차사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멀티롤을 수행하며 홍련의 기억 속 가해자나 방관자로 변신해 극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이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법정극의 단조로움을 탈피하고 서사의 입체감을 높이는 핵심 요소다.작품은 익숙한 고전의 틀을 빌려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폭력과 방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서로의 고통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인물들은 비로소 한을 풀고 해방을 맞이한다. 씻김굿의 본질적인 치유 기능을 무대 위에 구현한 이 공연은 오는 5월 17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관객과 만남을 지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