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문형배 협박’ 극우 유튜버, 술취해 음식점서 "빨갱이 XX" 폭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기간에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등을 겨냥해 살인을 예고하는 글을 올렸던 40대 유튜버가 최근 술에 취해 음식점에서 난동을 부린 혐의 등으로 경찰에 체포돼 결국 구속됐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5일 이 유튜버 유아무개 씨를 특수협박, 업무방해, 폭행 등의 혐의로 전날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다만 문 전 권한대행이 처벌을 원하지 않아 협박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유씨는 지난 3월 21일 서울 용산구의 한 음식점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린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당시 유튜브 생중계를 하면서 “빨갱이 XX들은 목을 잘라야 된다”, “민주노총, 이재명 추종하는 애들은 자유 대한민국에서 없어져야 될 XXX들”이라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발언도 했다. 이 같은 발언과 행동은 공공장소에서의 업무방해와 특수협박 혐의로 경찰 수사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또한 유씨는 3월 1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유튜브 촬영을 하던 중 시민과 충돌해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2월에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파손한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돼 3월 1일 검찰에 불구속 상태로 송치된 바 있다. 이처럼 유씨는 공공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범법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유씨가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우려가 크다고 판단해 지난 3월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당시 검찰은 “혐의의 핵심 증거인 동영상이 확보되지 않았다”며 영장 신청을 반려했다. 그러나 경찰은 계속 수사를 진행하며 유씨가 본인 유튜브 채널에 “윤석열 대통령님의 직무복귀를 위해 우리의 적들과 계속 싸우겠다”는 게시글을 올리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라이브 방송을 이어가는 등 범행을 계속하자,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하여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이후 경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지난달 28일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거쳐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유씨는 결국 구속됐다. 이번 사건을 통해 경찰은 반복되는 공공장소 난동과 협박 행위를 중단시키고 사회 안전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주목되는 점은 윤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기간에 유씨가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등을 겨냥해 살인을 예고하는 내용을 유튜브 등 인터넷상에 게시한 사실이다. 하지만 문 전 권한대행과 헌법재판소 측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혀 협박 혐의는 이번 기소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는 협박죄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인 점에 따른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유씨가 반복해서 공공장소에서 난동을 부리며 위험한 발언을 하고 폭력 행위를 저질렀다”며 “특히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극단적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해 구속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문 전 권한대행을 향한 협박 관련 부분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을 고려해 적용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은 온라인 공간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현실에서 폭력과 사회 불안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이 보장되는 시대이지만, 그 표현이 타인의 안전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 법적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한편, 경찰은 유씨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이며 추가 범행 혐의 여부도 조사하고 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유씨의 행위가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피카소에 밀려 자살한 비운의 천재 화가

 1922년 런던의 한 화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화가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유서에 "세상은 나와 피카소를 동시에 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절망의 기록을 넘어, 추상과 파격이 지배하기 시작한 근대 미술사에서 설 자리를 잃은 신고전주의 화가의 고독한 선언이었다. 자살을 수치로 여긴 가족들이 그의 모든 서류와 사진을 불태우면서 고드워드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증발할 뻔했다. 하지만 20세기 내내 모더니즘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의 이름은 7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예상치 못한 계기로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드워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미술의 언어가 급격히 전복되던 격변기였다.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정립하고 뒤샹이 변기를 예술로 선언하던 시절, 고드워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를 정밀하게 재현하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고집했다. 그는 자신의 화실을 고대 유물로 채우고 복식의 직조 방식까지 고증할 정도로 학자적 엄밀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평계의 조롱은 가혹했다. 평단은 그를 '대리석 화파'라 부르며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몰아세웠고, 결국 그는 영국 화단의 공식적인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그의 작품 '사포의 시대'나 '폼페이 성문 밖에서'를 보면 그가 추구했던 고전 세계의 생생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폼페이의 거리 풍경과 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선 역사적 복원에 가깝다. 고드워드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가 실재하는 로마로 이주해 작업을 이어갈 만큼 고전 미학에 투신했다. 하지만 그가 정교하게 쌓아 올린 대리석의 세계는 거칠고 화려한 현대미술의 질주 앞에서 무력하게 잊혔다. 건강 악화와 외로움 속에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시대와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잊혔던 고드워드를 암흑기에서 건져 올린 것은 1995년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였다. 그가 소더비 경매에서 고드워드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을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술사는 지워진 화가의 이름을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 유명인의 안목이 화제가 되자 대중은 처음 마주하는 이 낯선 화가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미술관의 권위나 평단의 비평 없이도 대중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고전적 미학의 위로에 반응했고, 이는 고드워드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고드워드의 명성을 살아있을 때보다 더 널리 퍼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공유된 그의 그림들은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대중은 미술사의 허락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그의 이미지를 보관하고 전파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게티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과거 그를 조롱했던 비평가들의 목소리보다 그의 화폭이 전하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드워드가 두려워했던 피카소의 시대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이 예술의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은 그와 피카소를 동시에 담기에 좁았을지 모르나, 시간의 흐름은 결국 두 거장을 나란히 예술의 전당에 올려놓았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화가의 육신은 사라졌어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증명하려 했던 고대 세계의 찬란함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고전의 가치를 믿었던 한 화가의 고집스러운 투쟁은 세기를 건너뛰어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미적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